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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군혜 여사

두군혜(두쥔훼이)

두군혜 여사는 운암 김성숙 선생의 부인이자 여성 엘리트운동의 혁명가로 '중국부녀자운동 이론 연구'의 선구자이다.
그리고 국적을 초월해 일제 침략을 타도하려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난 2016년 제 71주기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생몰년도
1904년(광동성 광저우시) ~ 1981년
필명
노 란
주요 공적

중국 항일독립운동가, 여성엘리트운동을 이끈 혁명가

1943.2 중국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요원

1945.5 한국구제총회 이사

2016.8 건국훈장 '애족장' 포상

가족

남편 김성숙: 독립운동가

첫째 두감: 전 광동성 교향악단 지휘자

둘째 두건: 북경대 중앙미술학원 유화학부 부학장

셋째 두련: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정보센터 고문, 「태자당」 주축

차남 두 건

독립유공자 운암 김성숙 선생과 두군혜 여사의 차남

중국 북경 중앙 미술 대학원 당 위원회 부위원장

“ 아버지의 상황은 우리들도 잘 모르고 여러 전문가들에게서 얻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1898년에 출생하여 3.1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중국에 손중산을 비롯한 혁명가들이 있고 러시아 10월 혁명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철학도 많이 공부하셨습니다. 3.1운동 때 아버지는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금강산에 가서 승려로 계셨습니다. ”
“외할아버지는 수화보험사의 직원이어서 광저우에서 괜찮게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중산대학의 1기 여자대학생으로 공부하였습니다. 진철군 열사는 어머니와 한 책상에서 공부했습니다. 당시 중산대학 1기에는 여대생 7명 뿐이었습니다. 하여 청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조선혁명가와 사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어머니의 집에 와서 생 무가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씻어 생 것을 그대로 잡수셨습니다. 그걸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생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하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습니다. 다행히 외할머니가 매우 활달한 분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늘 어머니를 두둔해 주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니의 학업을 지지한 것도 외할머니의 설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뚜르게 네브의 소설 <전야>를 어머니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당시 진보적인 사상을 접한 어머니는 피압박 민족의 해방이란 사상을 깨닫기 시작하였고 점차 혁명을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손자 두닝우 부부

손자 두닝우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독립유공자 운암 김성숙선생과 두군혜여사의 손자로 일류대학으로 알려진 뉴욕 줄리어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교수를 역임했으며 다수의 국제음악대회에서 수상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중국 등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 그 자체만으로도 한민족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현재는 중국 내 유명 음악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며, 음악 작곡 및 항일독립운동 관련 연주회 추진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는 조부모의 항일독립운동정신과 한국인의 피를 함께 지니고 태어남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선양 사업과 한·중 문화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2018년 KBS 해외동포상에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손자 며느리 Helen Sim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독립유공자 운암 김성숙선생과 두군혜여사의 손자며느리이다. 두닝우와 같이 일류대학으로 알려진 뉴욕 줄리어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교수를 역임했으며, 이탈리아 Senigallia대회에서 1등, 이그리거 더블피아노와 포핸드 연주 1위를 수상하는 등 다수의 국제음악대회에서 수상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다.

동지 정율성

김성숙 두군혜 부부의 친구(작곡가)
항일구국운동이 한창이던 1936년 남경에서 오월문예사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 운암 김성숙·박건웅 등이 건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담하였다. 남경(南京)에서는 운암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의 지원을 받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연안(延安)을 소개받아 이동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연안에서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다니고, 1938년 5월부터는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12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배치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두군혜 여사 연보

기간 주요활동
1924

중국 광동 광주 중산 대학에 입학

1926

6.23사건 참사 1주기 추모식 참석

1928

일본 유학을 하다 가을에 상해로 감

8월 김성숙선생과 결혼하여 상해에 정착,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상해에서 비밀 투쟁

1929

본격적으로 독립투쟁에 참여

1930

좌익 작가 연맹에 가입

1931

부녀자 문제를 마르크스 사상에 기초를 두고 연구하였고 2차 국공합작으로 항일전쟁에 참가

남편 김성숙과<사회 과학사전>과 <부녀자 문제 강의>를 출판

1934

심자구가 만드는 상해의《신보》의《부녀원지》에 진보적인 문장을 써서, 어두운 시기에 병폐를 폭로하여 부녀자의 권익을 촉구

1935

「상해문화계구국운동선언」을 발표

상해여성구국회에 가입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하고, 전국 각계 구국 연합회 이사를 역임

1936

<부녀자 문제 강의>를 완성하여 상해에 있는 신지식 서점에서 출판

중국 부녀자 운동 이론 연구의 선두자로 이름을 알림

1938

우한에서 조직을 열고 어린이 보육회 상무 이사를 역임했으며, 제7보육원 설립 원장으로 역임

1942

10월 중국 중경에서 설립된 한중문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

1943

2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외무부 부원으로 선임

4월 2일 외무부 과원으로 임명

9월 28일까지 외무부 정보과 과원으로 활동

1944

충칭에서 '직업 여성'을 출판하였고 편집장을 역임

중국 부녀자 친목회의 상무이사를 담당

부녀계와 문화계의 민주 운동에 전력

1945

5월부터 안정근이 회장으로 있던 한국구제총회의 이사로 활동

7월 『독립』에 한중 연합을 통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야 한다는 글을 게재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을 지원

1949

2월 북경으로 비밀리에 들어가 전국 부녀자 대표대회에 참석

9월 첫번째 중국 인민 정치 자문회의에 참석하였고, 북경시 여자 중학교 제2중학교 및 제6중학교 교장으로 취임

1951

제1회 전국 여성 연합 후보 위원회에 당선, 중화인민공화국 8대 대표 취임

1955

제4회 광역시 정협 위원회 상무 위원회 북경 제 6중학 당지부 비서 겸 교장으로 취임

1956

중국 공산 제8차 전국대회에 대표로서 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