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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관리자
조회수 : 69   |   2019-09-30


생몰연도 : 1879~ 1910


훈격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공적개요


- 1908년 연해주에서 의진 결성, 국내 진공 작전

- 1909년 단지 동맹 결성, 의열 투쟁,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 처단

- 1910년 옥중에서 <동양평화론> 저술 중 사형 순국

 

공적상세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의사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즉, 고려말 대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安泰勳)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특히 부친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해서(海西) 일대에서 문명을 날리고 있었는데, 의사는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趙)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장남이었다.

그런데 의사의 부친은 진사였으나 전통적인 유학에 머물러 있던 보수 유림은 아니었다. 그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혁신 유림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4년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그에 뽑히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고 말았다.

의사는 8세 때인 1886년부터 약 8~9년 동안 조부의 훈도로 유교경전 등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의사는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의사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개화파와 연계를 맺고 있던 의사의 부친이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의사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의사의 부친은 동학군이 해주감영에서 빼앗은 5백석 가량의 양곡을 회수하여 군량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후일 문제가 되어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즉, 이러한 사실이 중앙 정부에 알려지자 당시 갑오내각의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은 양곡 반환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양곡을 군량미로 다 사용한 의사의 부친은 명령을 이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개화파 동지인 김종한(金宗漢)의 도움을 받아 이를 무마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런데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정부가 전복되고 친미·친러 연립내각이 성립되자 척족 세도가인 민영준(閔泳駿)이 다시 강력하게 양곡 반환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의사의 부친은 천주교당으로 수개월 동안 피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의사의 부친은 프랑스인 빌렘(J. Wilhelem : 洪錫九) 신부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빌렘 신부 등 천주교 신부들의 도움으로 양곡 반환 문제가 해결되어 청계동으로 귀가한 부친은 의사를 비롯한 일가족 30여 명을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이에 따라 의사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빌렘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부여받았다.

이후 의사는 빌렘 신부로부터 교리와 함께 불어를 배우며 천주교의 포교에 힘썼다. 의사는 전도 활동 중에 일반 민중들과 광범위하게 접하면서 그들의 교육 수준이 낮다는 것을 깨닫고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민중 계몽에 종사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상경하여 외국인 신부들과 상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인이 학문을 하게 되면 믿음이 좋지 않게 된다"는 이유로 반대함에 따라 대학교 설립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이 일로 의사는 외국인 신부들에 대한 불신을 갖고 배우던 불어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의 천주교에 대한 신념은 굳었고, 신도들에 대한 사랑은 깊었다. 인근 금광의 감리(監理)가 천주교를 심하게 비방하자 의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찾아가 설득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앙 고위 관리에게 처와 재산을 겁탈당한 천주교 신도의 딱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상경하여 권력층과 당당히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즉 의사는 천주교의 입장에서, 그 교리인 박애주의를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의사는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통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의사는 산동(山東)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해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이후 의사는 그해 3월 청계동을 떠나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진남포에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석탄을 채굴하여 판매하는 삼합의(三合義)라는 광산회사를 평양에서 설립하여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하였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부인의 금반지와 은반지, 비녀 등을 비롯하여 전 가족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하면서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해져 갔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 이어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키며 한국을 식민지화하여 갔던 것이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이 되자 의사는 상경하여 이동휘 등 신민회 인사들과 구국대책을 협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권회복운동 방략을 계몽운동에서 독립전쟁전략으로 바꿔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의사는 1907년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의사는 노령 일대의 한인촌을 유세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노령 한인사회의 지도적 인물이자 거부인 최재형(崔在亨)의 재정적 지원으로 1908년 4월 연추(煙秋) 얀치혜에서 동의회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李範允), 회장 이위종(李瑋鍾), 우영장 안중근 등이었다. 이 동의회는 실질적으로는 참모중장(參謀中將)이었던 의사가 이끌었다. 의병부대의 규모는 3백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 연추를 근거지로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1908년 6월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한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洪範圖)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제2차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함경북도 경흥 부근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제1차 진공작전과 마찬가지로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아울러 전투 중에 10여명의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의사는 이들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 려 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의사가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사는 의병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사고, 또 포로의 석방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이후 온갖 고초 끝에 의사는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연추의 본거지로 귀환하여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하였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의병장에게 군자금을 대는 사람도 없었고, 그 부대를 지원하는 병사들도 없었기 때문에 의사는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그리하여 의사는 블라디보스톡, 수찬, 하바로브스크 등 여러 지역을 다니며 재기를 꿈꾸었다. 의사는 1909년 2월 의병 재기를 도모하면서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하는 한편 단지를 하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9월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의병참모중장으로 자신의 활동지역에 겁없이 쳐들어온 적장 이토를 온전하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인물들은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 최재형, 유진률(兪鎭律), 이강(李剛), 우덕순(禹德淳) 등이 그들이다. 그중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의사는 이토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의사 일행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포그라니치나야(수분하)에서 유동하(劉東夏)를 가담시키고 하얼빈에 도착한 뒤,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金衡在)의 소개로 조도선(曺道先)을 거사 준비에 합류시켰다. 그리하여 의사를 중심으로 이토 포살 계획은 주도면밀하게 추진되었다. 처음 의사는 의거의 완벽한 성공을 위해 만주 동청철도(중동철도)의 출발지인 남장춘(南長春)과 관성자(寬城子), 그리고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 등 4개 지점에서 거사를 실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자금이 모자랐고, 또 실행 인물도 부족하여 부득이 도착지인하얼빈과 채가구 두 곳에서 거사를 추진하였다.

교차역으로 열차가 정차하는 전략적 요지인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는 자신이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거사 지역 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 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의사는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를 기다렸다. 그런데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를 포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이들이 투숙한 역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의사의 거사 계획뿐이었다.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환영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를 갖고, 9시 30분 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라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키자 이토는 쓰러졌다. 이어서 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후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의사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자전적 기록인 『안응칠역사』를 끝내고,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 작은 소망조차도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의사는 당초 『동양평화론』을 ①서(序) ②전감(前鑑) ③현상(現狀) ④복선(伏線) ⑤문답(問答)으로 구성하여 저술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집필 도중 형 집행으로 말미암아 실제는 서와 전감의 일부만 남기게 되었다.

『동양평화론』을 통해 거사의 이유를 새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의사는 자신의 시대를 서양이 만들어 낸 생활방식인 약육강식의 시대로 이해하고, 그와 같은 생활방식에 따라 발생한 러일전쟁을 서양과 동양의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하는 일왕의 러일전쟁의 선전포고문에 따라 청·한 두 나라 국민은 일본을 지원하여 일본의 승전을 도왔음을 거론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은 패전하고 동양은 서양에 패하여 동양평화는 영구히 깨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환기시키면서, 이에 공헌한 청·한 두 나라 국민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청?한 두 나라 국민은 동양평화의 수호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승전한 후 곧 약속을 파기하고,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국권을 박탈하여 동양 평화를 파괴하였는데, 그 원흉이 이토라고 보았다. 때문에 의사는 이토가 한국의 국권을 박탈한 주범이고,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원흉이므로 처단하였음을 천명하였다. 따라서 이토의 처단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 국권의 회복과 동양평화의 회복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의사가 생각한 동양평화의 길은 어떤 것인가. 의사는 동양 평화의 길은, "첫째 일본이 우선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둘째 만주와 청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 그런 다음 서로 '독립한' 청국·한국·일본이 동맹하여 서양세력을 방어하며, 서로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서로 화합하여 개화와 진보로 나가서 구주 및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독립과 일제의 침략 야욕 포기가 동양평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동양에 평화가 깃들며 서구와의 평화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의사가 순국한 뒤 세계사의 진행 상황을 보면 이는 참으로 빛나는 견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의사의 이러한 충고를 무시했고, 그 결과는 지속적인 전쟁의 확대와 그로 인한 인류의 피해로 결판났을 뿐이었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 동양이나 서구,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의 전개였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날에도 의사의 사상은 새삼 되새겨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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